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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구 좋아하세요?” 추억이 다시 ‘지금’이 되었다.. <더 퍼스트 슬램덩크>

DenH 2023. 1. 14. 18:35

시계를 잠시 2000년대로 되돌려 보려 합니다. (TMI 주의) 아직 학생이었던 제가 좋아하던 것을 몇 가지 나열해 보자면 이렇습니다.

 

라디오헤드, 뮤즈, 킨, 콜드플레이로 대표되던 ‘영국 록 밴드’, 임요환을 따라 무수한 드랍십을 날려댔던 ‘스타크래프트’, 첫사랑 지은이를 따라 처음 가보았던 ‘캔모아’, 밤을 새가며 읽었던 용대운 작가의 무협소설 ‘군림천하’ 등등 그 시절을 살았던 많은 사람들이 열광해 마다 않던 문화 속에 저도 푹 빠져 있었더랬죠.

 

물론 지금도 라디오헤드의 음악을 듣고, 이따금씩 친구들과 PC방에 가 스타크래프트를 즐기고, 예전 무협소설을 꺼내 읽곤 하지만(캔모아는 어디있는지 도통 찾아볼 수가...,) 삼심대 중반이 돼버린 지금은 십대 시절의 감흥과 즐거움을 찾을 수는 없습니다. 아마도 이 ‘추억’이라는 것이 웃음기 가득했던 어린 시절의 마음과 뜨거웠던 삶의 온도가 뒤섞여야만 그 감흥을 만들어 내는 까닭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제가 <더 퍼스트 슬램덩크>를 보러 극장에 방문했던 건, 매일 출근길에 라디오헤드 음악을 듣는 것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개봉 소식과 함께 문득 떠오른 예전 추억을 다시금 되새김질 하기 위한 행위. 하지만 영화를 다 본 후 극장 밖을 나설 때, 저는 추억에 빠진 게 아니라 다시 십대의 그 뜨거웠던 열정을 되찾고야 말았습니다.

 

 

▶ 너희는 아직도 뜨거운 열정을 가지고 있구나! 여.전.히

 

영화 <더 퍼스트 슬램덩크>는 원작 팬들에게 아주 익숙한 밑바탕의 스토리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진행됩니다.

 

 

바로 전국대회에서 강백호, 서태웅, 채치수, 정대만, 송태섭의 북산고등학교가 전국 최강 산왕공업고등학교 농구부와의 한 판 승부. 카나가와 현 지역대회를 거치며 성장을 거듭한 북산고등학교 농구부가 ‘꺾이지 않는 마음’으로 최강과 맞붙은 이 경기는 아직도 많은 이들의 기억 속에 생생하게 남아 있습니다.

 

하지만 수십 년의 세월이 흐른 만큼, 스크린에 펼쳐지는 비주얼은 과거 TVA와 비교해서 괄목할 만한 성장을 이뤄냈습니다. 작가 이노우에 다케히코가 직접 매무새를 만진 3D CG 애니메이션은 역동적인 액션으로 박진감을 더합니다. 펜 선이 살아 있는 캐릭터들은 만화책에서 방금 나온 것처럼 보이지만, 이내 이들이 움직이는 순간엔 몰입감을 극대화시켜, 현실감을 100%로 만듭니다.

 

 

이 대목에서 더 재미있는 것은, 이처럼 매끄러워진 비주얼과는 다르게 강백호, 서태웅, 채치수, 정대만, 송태섭 등 북산고 5인방의 모습은 변함이 없다는 점입니다. 도무지 넘을 수 없을 것처럼 보이는 상대와 맞서면서도 승리의 가능성을 놓지 않는 뜨거운 열정, 팀워크를 위해 드높았던 자존심을 내려놓는 차가운 성장의 연속은 어린 시절 저를 두근거리게 만들었던 그 모습 그대로였습니다. 바꿔 말하자면, 추억의 감흥이 2023년 버전으로 리마스터링 돼 눈앞에서 현실로 다가왔다고 할 수 있겠네요.

 

 

▶ ‘어떻게’의 재현이 아닌 ‘왜?’의 확장판, 새로운 슬램덩크를 만나다

 

그렇다고 해서 이 영화가 멋스런 비주얼로 과거를 재현하는 데 그친다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원작에서는 거의 다루어지지 않은 여러 에피소드가 추가해, 캐릭터를 더 이해하고 몰입하게 만드는 ‘확장판’이라고 보는 게 더 적합해 보입니다.

 

원작 <슬램덩크>는 사고뭉치 소년들이 북산고등학교 농구부에 모여, ‘농구’로 한 마음이 돼 실력자로 거듭나고 전국제패라는 꿈을 향해 겁 없이 직진하는 것이 스토리의 골자였습니다.

 

이 시절의 <슬램덩크>에서 중요했던 것은 ‘어떻게 성장할까?’ ‘어떻게 승리할까?’ ‘주인공들은 이제 어떻게 될까?’ 같이 ‘어떻게’에 방점이 찍혀 있었기 때문이지요. ‘농구를 좋아한다’는 아주 멋진 이유 하나만으로도 이들의 열정 가득한 ‘어떻게’를 설명하기에는 충분했기에, 캐릭터마다의 스토리에는 그리 큰 비중을 할애하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다만 이번 영화 <더 퍼스트 슬램덩크>에서 이노우에 다케히코 작가는 송태섭의 사연을 중심으로 ‘어떻게’가 아닌 ‘왜?’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단순히 사고뭉치였던 고딩들이 ‘농구를 좋아해서 개과천선했다’가 아니라, ‘왜 그는 사고뭉치가 됐을까?’ ‘왜 그는 농구에 몰입하게 되었을까?’ ‘그는 왜 이렇게 자존심이 강할까?’와 같은 오랜 궁금증을 말이지요.

 

사실 무심하게 생각해보면 <더 퍼스트 슬램덩크> 속 이야기는 별 것 아닌 고등학생들의 농구 경기에 불과 합니다. 경기를 뛰고 있는 선수들이 아니라면 인생에 자그마한 영향도 줄 수 없는 작은 이벤트이지요. 그런데 여기에 사연이 담기는 순간, 이 경기는 ‘이벤트’가 아니라 코트 위에 뛰고 있는 ‘열 명의 인생’이 됩니다.

 

오랜 시간이 흐르면서 ‘아픔과 사연을 보듬어 줄 수 있는 어른이 된’ 독자들은 캐릭터들의 사연을 담담히 바라보면서, 교감하고 안쓰러워하며 미소도 짓습니다. 내적 친밀감이 더 커지게 된 거죠. 그로 인해 <슬램덩크>는 ‘오랜 친구’인 것처럼 여겨집니다. 누군가와 더 친해지는 데, 그 사람의 속사정을 듣는 것만큼 효과적인 방법은 또 없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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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logue]

 

영화를 다 보고 나오는 데, 괜히 이런 생각이 들더군요.

 

'이번 주말엔 아주 오랜만에 농구를 해볼까?'

 

괜스레 제 친구 (송)태섭이가 활약하는 모습을 보니, 잃었던 농구에 대한 열정이 불타오릅니다.

 

이제 조금은 늙어버린 몸뚱이지만, 십대의 마음으로 다시 무엇이든 시작해볼까 합니다.

 

제 옛 열정과 마음도, 다시 현실이 될 수 있을 것만 같아서 말이지요.

 

 

"좋아합니다. 이번엔 거짓이 아니라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