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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옷장을 정리하다. “보물과 그딴 것의 사이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DenH 2022. 4. 3. 10:44

느지막이 일어나 소파에 앉아 차가운 커피 한 잔을 마시며 여유를 즐기던 주말 오전. 문득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햇살이 따가워 ‘이제 옷장 정리를 좀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옷걸이에 걸린 두툼한 외투를 집어 바닥에 던져두고, 옷장 깊숙한 곳에 익어가던 봄옷을 꺼내 보았지요.

 

출처 : pixabay.com

 

H&M, 에잇세컨즈, 유니클로 등등 꼬박 반년 만에 모습을 드러낸 SPA 브랜드 옷들이 괜스레 반가운 것도 잠시, 지난 계절 동안 켜켜이 쌓이고만 묵은내에 고민이 불쑥 들어옵니다. 자세히 보니 색도 조금은 바랜 것 같고 유행과는 너무 동떨어진 듯한 디자인에, 입고 나가면 친구들의 놀림거리가 되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쳐 갔지요.

 

‘그냥 버릴까?’

 

버릴 옷들을 하나하나 살피며 이 옷을 입고 겪었던 추억까지 새록새록 그리다 보니, 뒤켠에서 한참을 살피던 어머니가 조용히 한 마디 꺼내시더군요. “그딴 데 몇 시간이나 시간을 허비하는 거니?”... 그딴 데.... 그딴 데?... 이 옷을 입고 무수한 추억을 쌓았던 제겐 이만한 중대사도 없는데 말입니다.

 

 

내색하지는 못하고, 혼자 속으로 화를 삼키고 있는데 괜히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감독 데이빗 프랭클) 속 패션 잡지사 [런웨이]의 미란다 편집장(메릴 스트립)이 비서 앤디(앤 해서웨이)에게 무섭게 일갈하던 한 장면이 떠올랐습니다.

 


 

대체 뭐가 다른 건데! / 영화 스틸컷

 

미란다와 에밀리(에밀리 블런트)가 어떤 색의 벨트가 좋을지 논의하는 중

 

앤디 “제 눈에는 똑같은 색이라서요. 이딴 거에 익숙지 않아요.(풉-)”

 

미란다 “이딴 거? 낡은 블루 스웨터를 입고 대단한 듯 잘난 척 떠드는데, 네가 입은 게 뭔지도 모르고 있잖아. 그건 그냥 블루가 아니라 세룰리안 블루야.”

 

“또 당연히 모르겠지만 드 라렌타와 입생 로랑도 모두 세룰리안 컬렉션을 했단다. (중략) 네가 가는 할인 매장에서 시즌 오프 할 때까지 수백만 불의 수익과 일자리를 창출했어! 패션계가 심혈을 기울여 만든 그 스웨터를, 네 패션 경멸의 상징으로 선택하다니. 웃기지 않아?”

 

...

 

누군가에겐 그딴 거라며 하찮을 수 있는 무언가가,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큰 의미를 가진 소중한 보물일 수 있다.

 

이딴 것하고 같이 일해야 하나? / 영화 스틸컷

 

영화 이야기를 조금 해보겠습니다.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는 아무 것도 모르는 사회 초년생의 성장기를 다룹니다. 영화가 이야기하고 싶은 그 성장의 방점은 ‘그딴 거’를 ‘소중한 보물’로 여겨가는 과정이라 생각합니다.

 

 

저널리스트를 꿈꾸던 앤디에게, 비서 역할은 그저 거쳐 가는 과정일 뿐이지요. ‘일’에서 느끼는 소중함은 없습니다. 일상에서의 소중함은 단지, 앞으로 건너가야 할 미래의 꿈과 사랑하는 남자친구를 통해 경험합니다. 편집장 미란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녀는 패션 산업을 이끄는 본인의 커리어와 일에 큰 자부심과 소중함을 느끼고 있지만, 늘 거쳐 갈 뿐인 ‘사람’에게는 소중함을 느끼지 않지요.

 

엄밀히 말하면 영화 초반부에는 앤디와 미란다, 서로는 서로를 ‘그딴 거’로 생각할 뿐입니다.

 

이후 영화는 집중적으로 미란다와 앤디가 서로를 이해하고 알아가는 과정을 그립니다.

 

 

앤디는 이 직장이 보장하는 미래로 인해 어쩔 수 없이 버티는 듯하지만, 점점 미란다의 신뢰를 받고 동행하게 되면서 점점 미란다가 얼마나 이 일에 진심인지, 또 어떠한 고민도 없는 독불장군인 줄 알았던 그가 사실은 많은 힘듦을 이고진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갑니다. 그러면서 이 일이라는 것이 어쩌면 누군가에겐 진정한 보물일지도 모른다고 인정합니다.

 

더불어 이 영화가 나왔던 15년 전에는 이해하지 못했지만, 미란다의 행동 역시 이젠 나이가 제법 들어버린 제 시선에서 어느 정도 공감이 갑니다. 사실 지금에 와서 꿈과 사랑이라는 말랑말랑한 것이, 현실이 더 중요한 나이 든 시선에서는 별 것 아닌 걸로 치부되는 때도 있으니 말이지요.

 

그래서 영화의 막바지에, 차 안에서 이야기하는 앤디와 미란다 둘의 시선은 방향이 다소 다릅니다. 앤디는 미란다를 존중의 시선으로 바라보고, 미란다는 마치 자신의 20대를 생각하듯 창밖의 풍경을 바라보지요. 오직 일과 꿈만이 보물이었던 이들에게, 또 하나의 보물이 생긴 듯합니다.

 

이렇게 서로의 사정을 알아가면서 쌓이는 감정과 그 감정에서 나를 투영해 공감하며 소중함을 더해가는 것. 그것이 어쩌면 보물을 찾아가는 과정은 아닐까요.

 

...


 

그딴 거에 대체 몇 시간이나 허비하는 거야?”

 

어머니의 이 말 한 마디가 마치 미란다처럼 여겨져서 괜히 서운함을 감추기 힘들었습니다. 어쩌면 이 옷들에 뒤섞인 내 추억을 알면 내 고민을 조금은 이해해 주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요.

 

“엄마, 이 옷들 하나하나에 녹아 있는 내 감정과 기억들은 생각을 안 해주는 거야?”

 

“그거 옛날 여자친구가 사준 옷 아니야?”

 

일단 이 옷은 버리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역시 앤디가 그랬던 것처럼 미란다가 그랬던 것처럼 보물 같은 기억은 추억으로 남겨두어야 더 큰 어른으로 성장할 수 있다는 걸 다시 깨닫게 됩니다.

 

 

-끝-

 

꼬리를 무는 영화 이야기 에디터 : Den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