꼬영이

흐드러진 벚꽃을 바라보다. “꽃은 언제고 다시 피어난다 <4월 이야기>”

DenH 2022. 4. 15. 09:47

4월, 청춘의 계절이지요. 30대에 들어선 지도 제법 시간이 흘렀건만 아직 마음만은 열여덟 살인지라 이 시즌이 되면 괜스레 마음이 두근두근 뛰곤 합니다.

 

어머니가 찍어 오신 벚꽃_선유도 공원


2022.04.09 토요일 오전, 꼬박 1년 만에 다시 핀 벚꽃이 반가워서 신발끈을 다시 묶고 집밖에 나설 준비를 하던 참이었습니다. 뒤편에 인기척이 느껴져서 돌아보았는데, 꽃이 잔뜩 그려진 하늘하늘한 옷에, 얼굴엔 구찌 선글라스를 낀 어머니도 초등학교 동창 친구들과 꽃구경을 간다고 하시더군요. 정확히 내일 모레(농담이 아니라, 정말 4월 12일에) 환갑이 되시는 어머니의 낯선 모습에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새어나왔습니다.

“엄마, 이게 무슨 일이야. 아직도 20대인 줄 알어?”
“오랜만에 봄이잖아~”

그리고서 나가는 길에 어머니를 모셔다 드리는 길에, 차 안에서 잠시 나눈 대화는 괜히 마음을 뜨끔하게 만들었습니다. “봄꽃 구경을 가본 지 10년 쯤 된 것 같다” “네 아빠는 사람이 낭만이 없다” “오늘은 반찬 냄새 안 맡을란다. 저녁 알아서 차려 먹어라”... 얼굴에 미소가 떠날 줄 모르는 어머니를 보며 영화 <4월 이야기>(1998, 이와이 슌지)의 주인공 우즈키(마츠 다카코 역)가 떠올랐습니다.


 

[사진=영화 스틸컷]

 

<4월 이야기>의 주인공 우즈키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교에 입학하는 스무 살입니다. 으레 일생에 가장 아름다운 때라고 불리는 스무 살. 생각해 보면 스무 살 이전의 우리는 “스무 살이 되면 뭔가 달라질 거야”라고 생각한다거나, 스무 살 이후에는 “스무 살 때가 좋았지...”라고 아름답다는 듯 돌이켜 보곤 하지요. 그 아름다움의 기대가 가득했던 소녀 우즈키 역시 들뜸을 감출 수 없습니다.

 

 

특히 오프닝 시퀀스에서부터 우즈키는 계속 ‘스스로 생각하는 스무 살의 모습’에 본인을 맞추려는 행동을 이어 갑니다. 달리 말하자면, “새로운 시작은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해야지!”라는 결심을 지키려는 의지어린 행동과 같은 것이지요. 하지만 이 모든 것들은 다 ‘처음’이기 때문에 어리숙하고 어려울 뿐입니다.

 

[사진=영화 스틸컷]


‘친절해야 해’라는 생각을 갖고 있는 듯이 짐을 옮기는 이삿짐센터 직원을 도와주려 발을 움직이다가 “여기 가만히 계세요”라며 친절 섞인 타박을 듣고, 또 대학교 입학식에서는 ‘성격이 밝은 척’하다가 동기들과의 대화에 괜스레 소심한 본연의 모습이 드러나곤 하지요. 그 모습을 보고 있자면, 저 역시 비슷했던 과거가 떠올라 부끄러워지게 됩니다.

물론, 영화의 포인트는 ‘스무 살 청춘의 미숙함’이 아닙니다. 그 미숙함 가운데 ‘우연’과 ‘필연’, 그리고 그 필연을 맞이하기 위한 ‘연습’이 필요하다는 말을 하고자 하는 듯합니다.

영화의 대부분은 우즈키가 새로운 관계를 맺어가는 과정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도무지 평범하다고는 볼 수 없는 동기와 친해지고, 묘한 이웃집 여자와의 이상한 만남, 그리고 우연히도(다분히 생뚱맞게) 들어간 동아리 낚시부. 낯선 사람들에게서 20년 인생에서 경험하지 못했던 수많은 감정을 배워가지요.

 

[사진=영화 스틸컷] "연습이야 연습!"


이 대목에서 제가 가장 마음에 드는 캐릭터들은 넓은 공터에서 허공에 낚싯줄을 날리는 동아리 선배들입니다. 일면 한심해보이기까지 하는 그들의 운동에 우즈키는 “대체 뭘 낚고 있는 건가요?”라고 묻지만, 동아리 회장은 웃으며 대답하죠. “연습이야. 연습!”

위 대사를 마주하는 순간, 영화 중반부까지 우즈키가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 감정을 쌓아가는 모습이 겹쳐집니다. 청춘에게 관계 맺음 또한 ‘연습’이었고, 그 연습이 습관이 되어 또 새로운 사람을 만날 때 비로소 가치를 갖게 된다는 이야기인 듯합니다.

 

 

그리고 영화는 거의 막바지에 다다랐을 때, 한 가지 비밀을 털어 놓습니다. 바로 우즈키가 도쿄로 대학을 진학하게 된 이유가 고등학교 시절 짝사랑 했던 ‘야마자키 선배’를 만나기 위해서 라는 겁니다. 앞서 우즈키가 연습했던 '관계 맺음'이 마치 야마자키 선배를 만나는 준비 과정이었다는 듯이 말이죠.

선배가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는 서점에 찾아가기를 수차례, 우연히 혹은 필연적으로 선배가 우즈키를 알아보며 인사를 하게 되고, 쏟아지는 소나기에 우산까지 빌려주며(우산을 돌려 줄 때 아마 둘은 밥이라도 한끼 하지 않을까요?) 영화는 67분의 짧은 서사를 마무리 하게 됩니다.

 


‘비로소 무언가 시작되려나?’ 싶은 순간에서의 마무리는, 벚꽃철의 짧은 즐거움과 닮아 있습니다. 벚꽃이 지고 새로이 장미가 피어나는 것처럼 또 언젠가는 설렘은 없이 진득한 장마철이 오기도 하고, 춥디추운 겨울이 다시 오겠지요. 하지만 벚꽃이 지고 난 그 뒤의 일은 아무리 고민해도 알 수 없다는(어쩌면 장마가 오지 않을지도?), 알 수 없기에 더 무한한 즐거움의 가능성이 있다는 것. 이게 청춘의 즐거움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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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생각을 마치고 조수석에서 친구와 전화를 하는 어머니를 살폈습니다. 오늘의 나들이는 얼마나 즐거울지, 카카오톡 프로필 사진으로 쓸 만한 사진을 건질 수 있을지 기대하시는 표정에 이런 생각이 들더군요.

‘엄마는 어쩌면 이번 봄을 위해, 60번이나 봄을 연습했던 건 아닐까?’

새로 피는 벚꽃과 새롭게 관계를 맺으려는, 61세 아주머니도 아직 청춘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앞으로의 무한한 즐거움을 기대하는 한 아마 62세가 되어도, 70세, 80세가 되어도 청춘이지 않을까요.

이렇게 보니 꼴랑 30대인 저도, 청춘은 아직 많이 남아 있는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