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토요일 오후 7시, 하루 종일 게임에 몰두하다가 다소 늦은 저녁을 먹기 위해 진라면 순한맛 한 봉지를 끓이려 냄비에 물을 올렸습니다. 역시나 방에서 뒹굴거리던 서른네 살 먹은 누나가 슬그머니 나오더니 “나 다이어트 하는 거 알면서 이 시간에 라면을 끓인다고?”라며 타박을 하더군요. 제겐 꽤나 익숙한 상황. 망설이지 않고 물었습니다.
“지금 얘기해, 한 입만 달라고 하면 진짜 때릴 거야.”
“됐어 안 먹어. 냄새나 안 나게 창문 잘 열고 먹어.”
5분 후, 보글보글 맛있게 끓은 라면을 식탁에 내려두고, 냉장고에 파김치가 떨어졌길래 김치냉장고에서 꺼내오려 잠시 자리를 비웠다오던 찰나. 식탁에 거먼 형태가 제 라면을 한 젓가락 먹고 있었습니다. 역시... 슬픈 예감은 틀리지 않더군요. 왼손엔 파김치 통을 들고 오른손을 불끈 쥐었습니다. 누나(초등학교 시절 수영선수 출신, 무에타이 5년)는 그런 저를 보며 “내가 냄새 안 나게 끓이랬지?”라 말하면서 씨익 웃더군요. 그러고서 야무지게 파김치에 라면을 한입 더 먹더니 강하게 제 등짝을 한 대 치곤 방으로 들어갔습니다. 어제 극장에서 봤던 <범죄도시2> 속 극악무도한 강해상(손석구 분)의 모습 그 자체였습니다.
네, 그 순간만큼은 저도 마석도(마동석 분)가 되고 싶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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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살다보면 부당한 일을 많이 당하곤 하죠. 하지만 대개 힘없고 연약한 저희 소시민들은 분노를 삼키며 반쯤 줄어버린 라면을 먹는 게 일상입니다. 그래서 어쩌면 이런 부당함에 의지할 곳이 없는 보편적인 우리를 위로하는 히어로 콘텐츠들이 인기를 끌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 대표적인 콘텐츠가 흔히 ‘마동석 장르’라고 불리는 영화들이지요. 오늘은 제가 애정해 마다 않는 그 장르의 매력을 한 번 이야기 해보려 합니다.
▶ 위기는 우리의 몫, 너는 나를 구해줘!
최근에도 큰 인기를 끌었던 <닥터 스트레인지>나 <스파이더맨> 같은 히어로 무비는 보통 다섯 단계의 일정한 서사 흐름을 따라갑니다. ‘악당의 등장’ - ‘위기’ - ‘성장’ - ‘고뇌’ - ‘극복’. 원래 영화라는 것이 히어로와 빌런이 너무 한 쪽이 너무 강해져서 일방적인 싸움이 된다면 그 재미가 반감되기 때문이지요. 51:49 못해도 60:40 정도는 돼야, (결국은 히어로가 이긴다는 것을 다들 알고 있음에도) 관객은 쫄깃쫄깃함을 느끼고 ‘혹시 지는 것 아니야?’라며 몰입을 하게 되는 건 당연합니다.
그런데, ‘마동석 장르’는 이 쫄깃함을 과감하게 빼고, 그 자리에 ‘통쾌함’을 채워 넣습니다. 서사 흐름으로 살펴보면 ‘악당의 등장’ - ‘추격’ - ‘완빤치 해결’이랄까요. 돌이켜보면 마동석 배우의 출세작 중 하나였던 <이웃사람>에서도, 드라마 <나쁜녀석들>에서도, 팔씨름 장르를 그렸던 <챔피언>에서도 그는 우람한 체격과 압도적인 힘으로 나쁜놈들을 제압해 왔지요. 금번에 개봉한 <범죄도시2> 그리고 전작 <범죄도시>에서는 잔혹하고 절대 꺾이지 않을 것 같은 힘을 가진 강해상과 장첸(윤계상 분)을 상대로도 단지 ‘완빤치’로 이들에게 승리를 거둡니다.
위기는 단지 주변인들의 몫입니다. 그래서인지 저를 포함한 많은 분들이 ‘마동석 장르’의 영화를 볼 때마다 주인공이 아니라 주변인들에게 감정을 이입하곤 합니다. 사회생활을 하며 또는 일상생활을 살아가며 겪곤 하는 무수한 힘듦이 오버랩되기 때문이겠지요. 카메라의 눈을 통해 그 위기를 체감하며 떠오르는 기대감은 ‘아... 동석이 형만 있으면 다 해결되는데...’ ‘빨리 나타나서 완빤치로 강해상을 혼쭐 내줘야 하는데...’라는 쪽으로 귀결됩니다.
이번 <범죄도시2>가 유독 더 재미있게 다가온 건 아주 개연성 있게 마석도를 피해가는 모습에서 여러차례 아쉬움을 주었기 때문인데요. 그 미꾸라지 같은 술래잡기도 결국 마지막 순간에 다다라서 더 큰 통쾌함을 주지요. 먼길을 돌고 돌아 강해상과 마석도이 마주하는 순간 우리는 머릿속은 한 가지 울림이 퍼집니다. ‘ㅋㅋㅋㅋㅋㅋㅋ 쇼타임이다 이 자식아!’ 절대 그가 패배할 것이라고는 일절 생각지 않습니다. 이 생각이 아마 마동석 장르의 진면목이 아닐까요. 내가 힘들 때, 어디선가 나타나 모든 걸 해결해주는 히어로. 지친 일상에서 우리가 기다리는 그 히어로를 영화 속에서 100% 표현해주는 것 같습니다.
▶ 강건한 신체에 의외의 귀여움, 허술함이 주는 실존감
“저는 병아리가 무섭습니다. 조금만 힘을 줘도 터질 것 같거든요.” 과거 마동석 배우가 했던 이 멘트가 그의 매력을 가장 잘 상징하는 이유입니다.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을 것 같은 비현실적인 몸매를 가지고도, 이따금씩 내뱉는 한 마디의 허당끼는 관객들로 하여금 그를 더 밀접하게 느끼게끔 유도 합니다.
사실 보통의 영화 속 히어로들은 ‘슈퍼스타’ 같은 인상이 강합니다. 인간성이 드러나긴 하지만 우리와는 너무도 다른 존재로서의 선이 확실하고, 재밌게 즐긴 후 영화관 밖에 나서는 순간 관객들은 다시금 우울한 현실 속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따지고 보면 일순간의 즐거움이랄까요.
하지만 ‘마동석 장르’ 속의 주인공은 극장 밖에 나서는 관객들에게 조차 현실에서도 그와 같은 히어로를 기다리게 만듭니다. 예컨대 아직도 회자되는 <베테랑>에서 “어~ 나 여기 아트박스 사장인데”라는 대사나 <시동>에서 트와이스 노래에 맞춰 춤을 추던 모습에서, ‘혹시 아트박스에 가면 저런 사장님이 있진 않을까?’ 혹은 ‘트와이스 콘서트에 가면 저런 사람이 있으려나?’ 싶은 생각을 유도하는 것이죠.
<범죄도시2>에서도 그의 허당 같은 모습이 현실감을 더합니다. “누가 5야?”라던지, “내리고 싶으면 벨 눌러~”, “이거 손주 갖다 주세요” 이런 대사들은 사실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허당의 면모이지요. 이 영화를 즐긴 관객들은 앞으로 힘든 일상을 살다가도,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버스 부저를 보면서, 빨간 경광봉을 보면서 나를 구원해줄 히어로를 기다리게 될지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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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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