꼬영이

내 인생에 자기계발이 필요하다면, 레슬링으로 하겠소..ㅠㅠ <반칙왕>

DenH 2022. 9. 18. 18:07

“자기계발은 좀 하니?”

 

얼마 전 오랜만에 학교 선배와 술을 마시는데, 대뜸 이렇게 물었습니다. ‘자기계발’이라니. 솔직히 되돌아보면 10년 전 쯤에 ‘취업’에 꼭 필요하다고 해서 컴퓨터 활용 능력 자격증이라던지, 토익 학원들 다녔던 것 이후로는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 일이라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그런 게... 필요해요?”라고 되물었죠. 어지간히 취해 있던 선배는 ‘잘 걸렸다’는 식으로 의자를 바짝 댕겨 앉아 조언을 시작하더군요.

 

“음, 자기계발이라는 건 말이야. 지금 네 인생에서 부족한 것을 채워가는 과정인데 말이야. 너도 무언가 일을 하면서든, 뭐 일상을 살아가면서든 ‘내가 이걸 못하네’라고 생각이 든 게 있을 거 아니야? 나는 프레젠테이션을 할 때 혀가 꼬이는 게 스트레스라서 요즘 스피치를 배우고 있어.”

 

자못 진지하게 떠들어 대는 그 모습을 보니 “스피치는 제대로 배우고 있구먼”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쉬지도 않고 한 시간이나 이야기를 해 저도 모르게 주먹이 쥐어지더군요. 그 순간 내게 필요한 자기계발이 떠올랐습니다. 185cm, 100kg이나 되는 이 사람에게 가볍게 드롭킥을 날려줄 수 있는... ‘레슬링이 어떨까?’하고요.

 

 

▶ 사각링에서 배우는 인생의 진리

 

보통 우리는 ‘틀에 박힌 삶을 산다’는 말로 일상을 표현하곤 하죠. 집-회사를 왕복하고, 주말엔 지쳐서 잠만 자기 일쑤입니다. 저 또한 계속 그렇게 살다보니, 이 ‘틀’이 내 삶의 전부가 되어 버렸고, 또 그 삶에 집착하기 시작했습니다. ‘안정적이다’라는 핑계를 대면서 말이죠. 영화 <반칙왕>의 주인공 대호(송강호 분)의 모습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그는 소심한 은행원입니다. 어디 소심하다 뿐일까요? 능력도 없어서 남들 다 거두는 성과를 한 개도 해내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뭐 그렇게 되고 싶어서 무능하고 소심한 사람이 된 건 아니겠죠? 매일 헤드락을 걸기 일쑤인 직장상사의 구박과 핍박에 점점 자신감을 잃어버린 까닭에 지금의 모습이 되어버린 것 같습니다. 이 지질한 삶을 ‘안정적이다’라는 이유로 내려놓지 못한 채 피곤한 표정으로 지하철에 올라타는 표정을 보면, 꾸역꾸역 하루를 버텨 살아가는 우리네 모습과 닮아 보입니다.

 

보통은 이렇게 살면 ‘어떻게 하면 내가 더 잘할까?’를 고민할 것 같은데, 대호는 우습게도 ‘어떻게 하면 저 상사 놈의 헤드락을 벗어날 수 있을까?’를 고민합니다. 아무래도 대호는 ‘인생에서 가장 부족한 것’을 ‘능력’ 따위가 아니라 상사에게 보복할 수 있는 ‘힘’이라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우연히 본 레슬링 체육관의 관원 모집 전단지에 가슴이 두근두근 뛰었는지도 모릅니다.

 

 

지루한 일상을 느릿느릿하게 조명하던 영화의 호흡이 바뀌는 것은 이때부터입니다. 체육관 관장의 딸인 민영(장진영 분)의 가르침 아래 ‘반칙 레슬러’로 훈련을 받기 시작하는 대호, 빨간 망토를 두른 채 동료와 유쾌하게 혈투를 벌이는 모습은 ‘회사원’일 때와는 180도 다른 모습이죠. 소시민의 설움을 털어내기라도 하는 듯이 공격을 ‘똥침’으로 방어하고, 포크로 상대방의 이마를 후벼 파는 건 현실에서는 상상할 수도 없던 ‘일탈’의 감각. 보기만 해도 통쾌합니다.

 

대호의 상사가 했던 대사를 빌리면 “동물의 왕국. 거기에 세상 법칙이 다 나와. 약육강식, 적자생존...” 사실 우리네 삶보다도 더 직관적으로 이 동물의 왕국이 표현되는 공간이 바로 레슬링의 사각링입니다. 때리지 않으면 맞아야 하고, 맞지 않으려면 반칙이라도 써서 상대를 제압해야 하는 그곳이요. 레슬링으로 ‘자기계발’을 택한 대호는 이 사각링에서 삶에 대하는 자세를 점점 배워 나갑니다.

 

 

▶ 가끔은 ‘나를 위해’ 반항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습니다.

 

말했듯이 이 사각링에서는 세상 살아가는 법칙이 잔뜩 통합니다. 레슬러로서 ‘노력하면 잘 할 수 있다’는 행복에 젖어있던 대호에게 관장은 다음 경기에서 일부러 져주라는 지시를 하죠. 상대인 유비호(김수로 분)가 팬들의 사랑을 받는 레슬링 고수이기도 하고, 사실 ‘반칙왕 캐릭터’는 패배하는 게 제맛이긴 하죠.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고의로 패배를 하라니요. 대호는 열심히 노력해서 지라는 게 도통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직장에서 부당한 대우를 받는 모습이 겹쳐보입니다. 

 

 

평소 직장에서의 대호였더라면 “네..”하고 풀이 죽은 채로 얻어 맞고 졌을 테지만, 그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반항이라는 것을 해보기로 마음먹습니다. 이 한판 승부에 내 모든 것을 걸고 이겨보겠다! 엎어치기와 메치기, 온갖 관절기와 반칙까지 난무하는 링 위. ‘내 마음대로 살아본 적이 없던’ 또 ‘열심히도 살아본 적이 없던’ 대호에게 모든 것을 건 이 결투는 형언할 수 없는 해방감으로 다가옵니다.

 

관중들도 이에 호응하듯이 처음에는 낄낄거리면서 대결을 바라보지만, 점점 진지하게 대호의 움직임을 바라보고 응원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날리는 회심의 한 방! 모든 노력과 열심을 쏟아부은 한 방에 찬사라도 보내듯이 카메라는 멋들어진 초고속 카메라 연출로 그의 활약을 조명합니다. 비록 승리하지는 못하였을지라도요.

 

대호의 멋들어진 승리를 바랐던 관객의 입장에서는 조금은 맥빠지는 결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만, 그 시도만으로도 알 수 없는 통쾌함이 몰려옵니다. 그래서인지 모든 것을 털어내고, 감춰두었던 가면 속 얼굴을 드러낸 그의 표정은 후회는커녕 속이 시원해 보이기까지 하는데요. 이 열심을 통해서 그는 더 이상 자신이 세상의 소모품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처럼 보입니다. 아마 링 밖에서 내려간 후에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세상을 향해 나아갈 테지요.

 

통쾌함과 해방감. 아무튼 감정이 여기까지 미치고 나니, 선배가 제게 했던 ‘자기계발’의 필요성이 조금은 마음에 와닿더군요. 쳇바퀴처럼 고단하게 돌아가는 밥벌이의 굴레를 즐겁게 돌리기 위해서는 아무튼 그 안에서 '내 만족을 위한' 자그마한 반항이라도 해보라는 그런 뜻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 반항은 결국 내게 자신감으로 치환될 거고, 그 자신감은 소심한 직장인이었던 우리를 더 당당하게 바꿔줄 테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