꼬영이

계절이 변할 때마다 생각나는 영화 <리틀 포레스트>

DenH 2022. 8. 27. 19:29

가난한 30대 남자에게 방에 에어컨을 설치하는 것은 사치라서, 매일 밤 선풍기를 틀어놓고 잠에 든 지 꼬박 3개월 즈음이 된 8월 말. 어제는 깊은 잠에 빠졌다가 으슬으슬 몸이 떨려서 잠에서 깨었습니다. 이제 열대야가 끝이 난 건지, 점점 가을로 계절이 옮겨가는 것이 실감이 가더군요.

 

다들 그냥 문득 생각나는 영화가 있으실 테지만, 저는 매 계절이 바뀌어 갈 때마다 <리틀 포레스트>가 떠오르곤 합니다. 물론 영화는 계절의 한가운데를 그리지만, 아마 제가 이 영화를 처음 보았을 때가 겨울에서 봄으로 바뀌어 갈 시기였고, 두 번째 보았을 때는 가을에서 겨울로 바뀌어갈 때였기 때문에 더욱 그런 것 같습니다.

 

아무튼 여름에서 가을로 바뀌어 가고 있는 오늘, 모기가 윙윙 거리는 한 저녁에 다시금 본 <리틀 포레스트>의 감상을 여러분들과 나누어 보고 싶습니다.

 

 

▶ 청춘(春)은 어쩌면 청‘환절기’라고 불러야 할지도 모르겠다.

 

개인적으로 생각건대 푸른 봄날을 뜻하는 ‘청춘’이라는 말은 지극히 감상적입니다. 왜냐하면 흔한 20대 청춘들은 자신이 푸른 봄날과 같은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죠. 물론 꼴랑 30대인 저도 20대 시절을 되돌아보면 ‘아.. 그때는 너무 아름다웠지...’ 생각하곤 하지만, 다시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때도 참 힘들었드랬죠. 그래서 어쩌면 청춘(靑春)은 나이 많은 어른들이 과거를 회상하며 붙인 감상적 별칭인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청춘이 봄이 아니라면 무엇일까?’를 고민해 봤을 때, 사실은 이리 흔들리고 저리 흔들리는, 진정한 어른의 삶으로 변화해야만 하는 환절기가 더 가깝다고 생각하는데요. 영화의 주인공인 혜원의 모습을 보면 딱 환절기와 같습니다.

 

영화 <리틀 포레스트>는 연애, 취업 뭐 무엇 하나 뜻대로 되지 않는 일상에서 눈물을 흘리던 것을 잠시 멈추고 시간이 멈춰버린 듯한 시골 고향으로 돌아온 혜원의 모습을 그립니다. 주변 상황에 상처 받고 흔들리는 모습이 썩 행복해 보이지는 않던 삶. 정말 감기로 꽤나 고생하는 환절기와 같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적어도 봄이라면 바람에 흔들리지는 않아야 하니까요.

 

 

아무튼 그렇게 고향으로 내려온 혜원이는 걱정 없이, 고민 없이 시간을 보냅니다. 마치 흔들렸던 도시에서의 삶을 보상받기라도 하는 것처럼요. 어떻게 보면 제철 재료로 맛있는 음식을 해먹고, 친구들을 불러 수다를 떨며 좋은 풍경 아래에서 여유를 즐기는 신선놀음을 하는 듯하지만, 제 시선에서는 아주 천천히 익어가듯이 변화하는 모습으로 느껴졌습니다. 그 익어감을 촉진하는 효소는 ‘여유’입니다.

 

 

 여유는 우리를 곶감처럼 맛깔나게 한다

 

제가 영화를 보면서 감명 깊었던 지점은 혜원이가 먹는 음식이 계절이 변화하면서 푸릇하고 싱싱한 갓 딴 채소에서 숙성이 필요한 음식으로 변화해 나간다는 점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봄날엔 이파리가 살아있는 ‘꽃파스타’, 여름엔 콩을 갈아서 짜낸 콩국을 활용한 ‘콩국수’, 가을엔 숙성시켜 먹으면 더 맛있는 ‘단밤조림’, 그리고 겨울엔 몇 달을 말려서 겨우 맛있게 먹을 수 있는 ‘곶감’까지.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왠지 제게는 이렇게 느껴졌습니다.

 

‘네가 그동안 힘들었던 이유는 아직 어른이 되기까지 익어갈 시간이 더 필요하기 때문이야’

 

 

영화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가끔씩 감을 손으로 주물러주면 훨씬 더 부드러운 곶감이 된다고요. 아마 도시에서 치열하게 살던 혜원이가 힘들고 지쳐버렸던 이유는, 누구 하나 위로의 손길을 보내주지 않았기 때문이고, 곶감이 되기 전부터 곶감이 되길 강요하는 ‘여유 없는 사회’ 탓이 크지 않았을까 합니다.

 

그래서 스크린 안에서 혜원이가 신선놀음을 하는 게 시샘이 난다기보다 흐뭇하게 느껴졌던 건 그렇게 여유를 느끼면서 점점 어른으로서 익어가고 있다는 게 눈에 보였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어른이 되어가는 건 혜원 뿐 아니라, 각자의 사연을 품고 사는 재하(류준열)와 은숙(진기주)도 마찬가지입니다. 역시 이리저리 치이는 회사 생활을 정리하고 고향으로 내려온 재하, 그리고 지루한 시골의 삶에 환멸을 느끼며 살아가는 은숙까지 그 형태는 조금씩 다를지라도 다들 혜원이 가져온 ‘여유’를 느끼면서 조금씩 어른으로 성장해 나갑니다.

 

어쩌면 지금 여러분이 힘든 것도, 익어갈 여유 없이 계속 달려왔기 때문은 아닐까요? 물론 2030에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라 40대, 50대 심지어는 60대도 그럴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익어가는 것은 그냥 시간이 흐른다고 되는 게 아니니까요.

 

 

 그래서 왜 계절이 바뀔 때마다 이 영화가 떠오르는 거죠?

 

제가 계절이 변해갈 때마다 이 영화가 떠오르는 건 아마 계절이 바뀌려 할 때마다 어른이 되어 가기 위한, 조금 더 익어가기 위한 여유가 필요하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저는 그 주기가 적당한 것 같더라고요.

 

 

그 계절마다 느낄 수 있는 것들이 있습니다. 영화 속 혜원이가 하는 행동들을 보면 참고가 되긴 하는데요. 봄에는 들로 산으로 떠나서 묻혀 있는 봄나물을 캐본다거나, 여름에는 바깥 평상에 앉아 수박을 먹으며 친구와 한가롭게 수다를 떨어본다거나(계곡 바위에 앉아 물에 발을 담가보는 것도 좋겠네요), 가을엔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시원하게 자전거를 타고 돌아다니고, 겨울엔 따끈한 방바닥에 누워 드르렁 낮잠을 자는 것 말이죠.

 

그래서 이 영화를 보면 저는 괜스레 마음이 조급해집니다. 이 계절이 가기 전에 나도 저걸 해봐야 하는데! 하고 말이죠. 이 계절에만 느낄 수 있는 특별한 여유의 방법. 여러분들도 한 번 이 여름이 다 가기 전에 마지막 여름 여유를 즐겨보시는 건 어떨까요? 그러면 아마 조금 더 익은 나를, 조금 더 어른이 된 나를 느껴볼 수 있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