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 혼자 보아야 할 영화. 500일의 썸머
오만가지 감정이 드네요, 500일의 썸머
This is not a love story, this is a story about love.
이 영화는 사랑 이야기가 아닙니다, 사랑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아주 개인적인 추억으로 필자가 고른 음악이 있는 영화는 마크 웨브가 감독하고 조셉 고든 레빗과 주이 디샤넬 주연의 <500일의 썸머 (500 Day's of Summer, 2009)>입니다. 아주 오래전에 본 영화임에도 삶의 순간순간이 감정의 촉수를 건드리면 늘 떠오르는 영화이기도 합니다. 영화 도입부의 인디 감성 가득한 Regina Spektor의 노래 'US'는 저를 단번에 영화 속으로 몰입시켰습니다. 그녀의 날것 그대로의 보이스는 무언가 심장을 파고드는 매력이 있습니다. 원곡의 공식 뮤직 비디오도 뛰어난 영상미를 자랑합니다.
사랑이라는 단어만큼 느낌도, 해석도, 의미도 넓은 단어가 없을 것입니다. 특히나 영어 단어 love는 너무도 폭넓게 쓰이죠. 순간 훅 들어온 취향저격이나 몹시 빠져있는 무엇에서부터 지고지순하고 애틋한 감정까지 모조리 love 한다고 말합니다. 역설적으로 지고지순하다고 믿었던 애틋한 감정도 결국 사라지고 말 한계효용의 법칙에 갇힌 욕망의 다른 얼굴일 뿐일 수도..
이 영화는 운명적 사랑을 꿈꾸는, 조금은 찌질한 남자 톰(조셉 고든 레빗)이 지극히 현실주의 적인 여자 썸머(주이 디샤넬)를 만나는 이야기입니다. 영화 트레일러의 첫 내레이션처럼 '남자가 여자를 만나는 이야기'죠. 영화를 보다 보면 남녀를 떠나 어떤 사람은 톰이 되고 어떤 사람은 썸머가 됩니다. 그리고 너무 현실적이라 동심 파괴의 만행을 넘어선 낭만 파괴 수준입니다.
정신 차려 이 친구야
자신의 꿈과는 상관없는 직장을 다니는 톰은 내성적이고 독특한 취향을 가진 사교성과는 거리가 먼 여리여리한 성격입니다. 언젠가 이런 자신에게 꼭 맞는 큐피드의 화살을 맞는 날을 기다리는 로멘티스트이기도 하죠. 어느 날 사장의 여비서로 채용되어 첫 출근을 한 썸머를 보고 한눈에 반한 톰, 썸머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톰이 듣고 있는 음악이 헤드폰 너머로 새어나오자 자기도 그 곡을 love 한다고 먼저 말을 겁니다. 그리고 쿨하게 내려 버리죠. 여기서 퀴즈! 로멘티스트 소심남은 무슨 생각을 할까요? 정답! '어? 이런 음악을 좋아한다고? 대박.. 잠깐, 그런데 왜 굳이 내게..? 나 좋아하나?' 이겠죠.
썸머는 직장 내에서도 핵 인싸녀로 인기가 많습니다. 그러나 도도녀로도 유명합니다. 찌질남 톰은 당연히 관심 없는 척하죠. 그래도 영 겁쟁이는 아니라서 여차 저차 해서 그녀와 가까워질 계기가 생기고 한국 사람 입장에선 할거 다 해서 분명히 사귀는 거 맞는데, 그네들 입장에선 썸 수준인 알듯 모를 듯한 관계를 이어갑니다. 그러나 썸머는 '남자 친구'는 아니라고 분명히 선을 긋습니다. 로멘티스트에겐 그런 정의는 안 중요하죠 더 깊이 더 빨리 그녀와 사랑에 빠집니다. 영화에 삽입된 뮤지컬 장면은 그의 순수하고 어린아이 같은 사랑의 판타지를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서툰 계절, 썸머와의 관계는 오래가지 못합니다. 썸머는 찌질이 로멘티스트 남자 입장에서 보면 슬슬 성질을 돋우는 행동들만 합니다. 오직 그녀의 행복, 즐거움을 위해 이용당하는 느낌마저 듭니다. 톰의 속도와 썸머의 속도가 다르고, 같은 장소, 같은 경험 속에서도 서로가 원하는 건 달랐습니다. 결국 둘은 썸(?)을 끝낼 운명에 처합니다. 톰은 청천벽력입니다. 폐인처럼 살며 주변 사람에게 독설을 퍼붓고 직장에 허구한 날 지각을 하는 등 질척거림의 끝판왕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썸머는 톰에게 이별을 통보하고는 덤덤히 잘만 살아갑니다. 게다가 다시 친구로 돌아왔으면 좋겠다는 쉰소리를 하질 않나, 급기야는 금세 운명의 남자를 만나 사랑에 빠져버립니다. 그 과정에서 도저히 톰에겐 견딜 수 없는 태연하고 냉정한, 그래서 너무도 잔인한 행동들을 하죠. 톰을 자신의 결혼 파티에 초대를 한 겁니다. 뭇 남성들이 영화를 보다 부글부글 끓으며 썸머를 'ㅆ년'이라 부르는 대목입니다.
당신도 누군가에겐 또라이다
이 영화는 내내 톰의 관점에서만 내레이션 이어집니다. 그러나 이것을 뒤집어 보았을 때 깨닫게 되죠. 운명적 사랑을 만나길 꿈꾸던 톰은 너무도 현실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여자를 만나 호되게 당하고 자신밖에 모르는 냉정한 여신 썸머는 오히려 운명적인 남자를 만나 한 없이 행복해지는 이 사실. 썸머는 가해자, 톰은 피해자가 될까요? 사랑에 대한 관점과 가치관이 다른 두 사람이 만났다 결국 헤어지는 이야기. 우리 삶에서 언제든, 얼마든 일어나는 이야기 일 뿐입니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이야기가 무엇을 남겼느냐입니다. 두 사람의 삶에 있어 love란 도대체 어떤 의미인지. 영화는 너무도 섬세해서 몇 번이고 다시 보지 않으면 수많은 숨겨진 이야기를 놓칩니다. 현실적이고 냉정한 여자란 톰의 입장에서 그럴 뿐입니다. 톰이 오히려 현실감각이 없고 공감력이 결여되어 있으며, 오직 자신만의 세계 속으로 썸머가 들어오길 강요했던 것은 아닐까요? 톰이 그녀의 삶에서 남자라는 존재에 대한 관념, 인기녀라는 껍데기 뒤에 숨은 두려움이나 욕망에 다가갈 수 있었다면 얼마든 마음을 열었을 것입니다.
어쩌면 썸머는 가장 겁쟁이 일지도 모릅니다. 사는 동안 실망스러운 남자들에게 시달렸을 수도 있겠죠. 그래서 철저한 기준을 정해 두고 그 관문을 통과하지 못하는 남자와는 진짜 삶을 나누기 싫은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가식적이기보다는 솔직하지만 거리를 두어 진짜 운명의 남자를 가려내고 자신을 보호하는 것입니다. 이건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닙니다. 처음부터 남자 친구는 싫다고 선을 그었지만 유심히 그를 관찰했습니다. 분명 그를 아주 많이 좋아했죠. 다시 보기를 하면 톰이 정말 그녀의 마음을 알아차렸다면 얼마든 그를 받아주었을 많은 장면들이 뒤늦게 발견됩니다. 참 묘한 영화입니다.
시간은 500일이든, 1000일이든 결국 흐릅니다. 썸머의 조언으로 결국 자신이 하고 싶었던 일인 '건축가'로서의 삶을 살아가기로 결심한 톰은 지원한 회사의 면접장에서 같은 지원자 여성과 대화를 나눌 기회를 가집니다. 호감이 가지만 습관처럼 돌아서는 톰. 그러나 이제야 조금 성숙해진 걸까요? 모든 것은 운명이 아닌 자신의 선택에 달렸다며 자신에게 말합니다. 썸머로 부터 배운 것이죠. 되돌아가서 그녀에게 대시를 합니다. 처음에 거절하던 그녀는 힘없이 돌아서는 그를 불러 세웁니다. "뭐 안될 거 없죠, 반가워요 저는 어텀(Autumn)이에요"
뒤죽박죽 추억 같은 영화
이 영화는 시간순이 아닙니다. 썸머와의 만남과 이별, 그리고 새로운 만남까지의 500일을 뒤섞어 놓았습니다. 혼란스러운 우리 첫사랑의 기억처럼 어차피 순서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걸 굳이 따지지 말고 그저 감정의 흐름에 맡기고 보시면 됩니다. 우리의 첫사랑은 아름답거나 흑역사로 남아있습니다. 그러나 둘 다 조작된 기억일 가능성이 높죠. 진실 따윈 없어요.
슬퍼도 아름답게, 질척거리고 야만적이었어도 낭만으로 덧칠을 합니다. 뜻대로 되는 것도 없었고, 기대만큼도 아니었어요. 그러니 내 생의 첫 필모그래피에 누군가를 악역으로 놓아야 합니다. 찌질이였던 나 아니면 잘났던 너입니다. 영화적으로는 영리하고 섬세한 이야기 배치에 그저 감탄할 뿐입니다.
좋은 말, 힘 있는 말, 뜻깊은 말은 생명체처럼 살아 숨 쉰다고 하죠. 각자 다른 상황의 사람들에게 오직 자기를 위해 한 말처럼 느껴진다고 합니다. 이 영화가 그렇습니다. 500명이 본다면 500가지 모양의 이야기로 남는 영화, <500일의 썸머>였습니다. 현재 이 영화는 디즈니 플러스 채널에서 볼 수 있습니다.
PS. 옆에서 같이 영화를 보는 여자 친구, 남자 친구도 전혀 다르게 영화를 보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괜히 썸머와 톰을 가지고 논쟁하지 마시고 가능한 혼자 보세요. 커플 브레이커로 유명한 <건축학 개론>, <완벽한 타인>만큼이나 위험한(?) 영화랍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