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이 있는 영화

80년대, 우린 이러고 놀았다. 'Street of Fire'

필더무비 2021. 8. 2. 22:49

 

로큰롤이여 영원하라! 스트리트 오브 화이어(Street of Fire, 1984)

 

1984년 혜성 같이 나타나 센세이션을 불러일으킨 영화 ‘Street of Fire’. 팝과 록 뮤직의 전성기이자 대중문화의 빅뱅을 누렸던 세대의 치기 어린 청춘극이다. 대놓고 ‘로큰롤 우화(A Rock & Roll Fable)’라 정의 내리는 영화는 이 불타는 청춘의 잔혹동화에 전자 기타와 신디사이저, 드럼, 그리고 한껏 질러대는 목소리가 난무할 것을 예고한다.

 

 

Street of Fire Official Trailer(1984)

 

시작부터 ‘다른 세계 다른 시간’이라 말하는 영화의 배경은 우리가 아는 미국의 어느 동네가 아니다. 평행우주의 로큰롤 행성에 사는 인간을 닮은 어떤 종족의 이야기랄까. 다시 말해 어딘가 무능한 치안 시스템 위에서 다투는 길거리 양아치, 폭주족, 그리고 길바닥 인생들의 막장 투쟁기다. 이 영화의 출연 진들은 죄다 드럼 비트에 맞춰 주먹질과 발길질을 하고 심지어는 주요 대사도 절묘하게 리듬을 탄다. 이곳은 로큰롤 행성이 확실하다!

 

 

도시 환경관리자가 누군지 풀 한포기 없다. 출처 : IMDb.

 

반면 지구의 불편하고 구린 것들만 잔뜩 모아놓은 것 같은 도시. 어둡고 축축한 건물과 도로, 낡고 녹슨 난간, 풀 한 포기 나지 않은 고가 도로 밑의 쇠기둥.. 10분만 서 있어도 매너 없는 자동차들이 튀긴 구정물에 옷을 버릴 것같은 미장센은 일품이다. 80~90년대 미국 영화 특유의 노이즈 가득하고 묵직한 컬러를 뚫고 나오는 현란한 원색 조명들은 MTV 뮤직 비디오 같은 매력을 품고 있어 추억을 소환한다.

 

 

재즈를 부를 것 같지만 찰지게 록을 하고 계신다. 출처 : IMDb.

 

영화는 레트로 느낌이 가득한 로큰롤 공연으로 시작한다. 모두의 불타는 저녁을 책임지는 여주인공 엘런(다이안 레인 Diane Lane 분)의 열정적 퍼포먼스. 하지만 그녀의 얼굴과 목소리가 서로 사맞디 아니하여 ‘이 집 립싱크 참 잘하네’라 생각 중인데 밑도 끝도 없이 폭주족들이 들이닥친다. 배경음악 비트에 맞춰 닥치는 대로 사람들을 패더니 그녀를 납치한다. 공연을 보던 남자 주인공의 누나는 막 군대에서 제대한 동생 톰 코디(마이클 파레 Michael Paré 분)에게 전보를 쳐 고향으로 와 줄 것을 요청한다.

 

 

전 여친이 곰신이 아니라 삐친 남자 주인공. 출처 : IMDb.

 

군대 간 사이 전 여친 엘런이 꽃미남인 자기 대신 음악(실은 음악을 할 수 있게 밀어줄 남자)을 선택한 바람에 상처 받은 그는 단번에 거절한다. 동생에게 상처 준 여자의 공연을 보러 다니고, 무서운 폭주족으로부터 목숨 걸고 구해내라는 누나를 보면 이 집안 가훈이 ‘남자는 가오다. 강하게 키우라’인 건지 의아하다.

 

 

막장 영화는 역시 '우연'이다. 출처 : IMDb.

 

싫으면 취직이나 할것이지 누나와 다투고 술 먹으러 간 철없는 동생. '우연히' 바텐더를 주먹으로 날려버리는 여장부 머코이(에이미 메디건 Amy Madigan 분)를 만난다. 둘 다 전직 군인이라는 공통점 말고는 찾아볼 게 없는데, 다짜고짜 숙소를 부탁한다며 앵겨 붙는 머코이. 톰은 잠시 튕기더니 그녀를 누나네 집으로 데리고 간다. 아아, 군필자들의 의리란!

 

 

머코이.. 대체 어떤 삶을 살아온거야.. 출처 : IMDb.

 

머코이는 80년대 한창 피어오르고 있던 미국내 젠더 의식을 대변하는 캐릭터다. 전형적인 여성의 모습도 목소리도 외모도 아닌, 그냥 강인한 휴먼 그 자체. 그 해석이 남성에 대한 미러링(Mirroring)에 불과하다는 한계도 있지만, 뭐 싸움만 잘하면 됐지 여자, 남자가 무슨 상관이람…

 

 

얼굴 뜯어 먹고 살것도 아니고 남자는 능력이야. 출처 : IMDb

 

말도 안되지만 엘런을 구하러 함께 길을 나서는 현남친이자 소속사 사장님(릭 모레니스 Rick Moranis 분).  그는 주인공에 비해 외모도 뭣도 안되지만 자본주의의 얼굴을 가지고 있다. 자존심은 있어서 1만 불에 현남친에게 고용되는 척(사랑해서가 아니야! 흥!), 전 여친을 구하러 가는 톰은 만난 지 며칠 되지도 않았는데 끼워 달라며 들이대는 머코이에게 10%를 주기로 하고 운전과 총질을 시킨다.

 

 

그러나 꽃미모 인정. 마이클 파레(Michael Paré). 출처 : IMDb

 

그야말로 '만찣남' 외모의 남자 주인공 역의 마이클 파레(Michael Paré). 강렬한데 웬지 졸린 듯한 눈빛, 딱히 근육도 없는 허여멀건한 타입이지만 허우대 하나로 나름 주인공의 중심을 잡는다. 영화의 구성과 연기가 엉성해 그의 진정한 매력이 어땠을지는 영화가 끝나기까지 도통 알 수가 없다. 출연한 캐릭터 모두 입체적 해석 따위는 안드로메다로 보낸 듯 그냥 등장하고 엮인다. 그나마 영화 내내 흐르는 쿵쾅 거리는 배경음악은 피곤할 때쯤 적절히 끊어 줘 다행이다.

 

 

<Street of Fire> 가장 큰 장점은 Street, 약점은 Fire다. 출처 : IMDb

 

머코이가 폭주족의 아지트 클럽에 잠입할 때 나오는 충격적인 스트립 댄스씬은 언급하기도 싫고 노약자는 시청을 자제할 것을 권한다. 영화와 아무 상관없고 도무지 왜 그렇게 길~게 나오는지 모를 일이다. 어찌어찌 폭주족을 뚜까 패고 여친을 구해내고는 납치범과 인사까지 하는 여유를 부리는 톰. 역시 ‘가오’가 가훈임이 분명하다.

 

 

딱히 분장 없이도 이런 분위기를 만들다니.. ㅎㄷㄷ. 출처 : IMDb

 

폭주족 두목을 연기 한 윌리엄 데포(Willem Defoe)는 리즈 시절이지만 분장 없이도 배트맨 시리즈의 조커같은 분위기를 풍긴다. 그러나 조커 같은 긴장감을 주기엔 대사와 연기 리딩이 영 맞지 않는다. 남자 주인공 톰은 알아서 달려와 처맞아주는 폭주족들과 총만 쏴도 폭발해 버리는 그들의 오토바이와 아지트를 아작 낸다. 물론 리듬에 맞춰서.

 

 

종말 이후를 그린 재패니메이션(Japanimation)의 한 장면같은 색감과 질감. 실은 일본이 이 영화에 영향을 받았다. 출처 : IMDb

 

그 뒤로도 맥락 없는 에피소드들이 쭉 이어지며 작정하고 밀어 붙인 클리셰 덩어리들이 쌓이면서 스토리는 흐른다. 여자 주인공은 너무 빨리 구출되고서는 로드 무비 형식의 모험물로 장르가 변경된다. 이렇게 영화는 흐름이 종잡을 수 없고 수시로 나오는 오버랩과 시끄러운 록음악에 쉽게 지친다. 그러나 ‘그때 그 시절’이 궁금하다면 꼭 한번 볼 만한 영화다. 투박하고 왁자지껄한 사람 냄새, 땀 냄새(담배 냄새는 사절) 나던 시절의 분위기 말이다. 한 땀 한 땀 아날로그로 그리고 붙인 세트장과 거친 입자의 필름 느낌, 잔뜩 멋을 부린 어깨뽕과 사자머리 패션을 볼 수 있는 시대 고증용 영화다. 

 

 

딱히 분장 없이도 이런 분위기를 만들다니, 2. 출처 : IMDb

 

영화는 전~혀, 너~무 긴장감 없이 후반으로 치닫는다. 원래 자기 여친도 아니면서 분노한 폭주족들이 거리를 점령하고 경찰은 손을 못쓴다. 이쯤 되면 거의 무정부 상태의 서부시대처럼 보인다. 그렇다. 영화는 80년대의 록 음악에 50년대의 배경, 그리고 서부영화의 시대상과 이야기 구조를 담은 기이한 형태를 띤다. 경찰을 무능한 보안관으로, 오토바이를 전부 말로 바꾸고, 자동차를 마차로, 아스팔트를 진흙길로 바꾸면 된다. 전자기타와 드럼 대신 벤조를 울리면 서부극 그 자체다. 마지막 결투 장면도 그러하다. 주인공 옷도.. 그러하다. 영화 내내 잘 입고 있던 트렌치코트 속에 낡은 멜빵바지를 꼭 입었어야 속이 후련했냐! 그것도 클라이맥스에!

 

 

'수퍼맨 엄마' 다이안 레인은 그 시절 비현실적으로 예뻤다. 출처 : IMDb

 

톰은 영화 내내 똥폼을 잡아대지만 사실 그는 액션 히어로가 아니다. 이 영화는 찌질하고 허우대만 멀쩡한 반항아가 진정한 사랑이 뭔지를 깨달아 가는 영화(처럼 보인)다. 끝까지 돈 때문이 아니라 사랑 때문이라며 능력자 현남친에게 엘런을 양보하며 쿨하게 떠나는 톰. 그녀의 행복을 위해서라지만 아직 정신 못 차린 거다. 정말 그녀를 사랑한다면 폼 잡을 시간에 책임을 지고 돈을 벌어야지! 영화는 아무 생각 없이 보면 그냥 아, 그 시절 이러고 놀았구나 싶은 재미있는 작품이지만, 감독의 의도적으로 만든 '병맛 B급 정서' 때문에 완성도를 따지면 피곤해진다. 마초, 폭력, 출구 없는 사랑이 그야말로 락 앤 롤을 하는 난장판이다.

 

 

월터 힐(Walter Hill) 감독(가운데 반바지 아저씨)과 제작진. 출처 : IMDb

 

이 영화는 콘셉트에 진심인 감독의 열정에도 불구, 미국 개봉 수입이 제작비 1,450만 달러의 절반 정도에 그치는 처참한 흥행실패를 맛봤다. 반면 우리나라에선 젊은 관객의 열광적 호응으로 서울 관객만 24만 명을 동원해 큰 흥행을 했던 기묘한 영화다. 개봉이 끝난 후에도 동네 비디오 가게에선 한동안 인기 대여 타이틀이었다. 개봉관 국도극장은 당시로선 생소했던 '돌비 스테레오 사운드 시스템(Dollby Streo Sound System)'을 갖추고 있었다. 난생처음 들어보는 뛰어난 음질 덕인지 미국에선 주목조차 못 받았던 오프닝곡 ‘Nowhere Fast’는 대히트를 쳤다. 영화를 아예 모르는 사람도 하루에도 몇 번씩 라디오를 통해 들었다고 한다.

 

 

 

호흡장애로 실려간 사람은 다행이 없었다. 출처 : 나무위키

 

오프닝 곡 ‘Nowhere Fast’ 홀리 셔우드(Holly Sherwood)가 부른 곡을 립싱크 했다.

 

일본에선 더 크게 흥행을 하여 팬들이 뽑은 그 해 1위 영화가 된다. 그 후 일본 전반의 서브 컬처와 애니메이션, 게임에도 큰 영향을 주었던 희한한 영화. 지금도 컬트 마니아들에겐 여전히 사랑받는다. 나에겐 우아한 여배우 다이안 레인과 영화 플래툰(Platoon, 1986)의 명배우 윌리엄 데포의 리즈 시절을 볼 수 있는 아련한 추억에 가깝다. 그럴 리 없겠으나 혹여나 똘기 충만한 감독이 나서 리메이크한다면 나름 흥미로운 작품이 될 것도 같다.

 

 

자신들의 버스 탈취범에게 취직을 부탁하며 노래까지 부르는 브라덜. 출처 : IMDb

 

마지막으로 지금껏 깊이 뇌리에 깊이 남아 있는 삽입곡, 그레그 필린 게인즈(Greg Phillinganes)의 'Countdown to Love'를 소개하겠다. 폭주족에게 쫓기던 주인공 무리가 지나가는 무명 그룹의 버스를 탈취한다. 엘런이 유명가수임을 알아보고 캐스팅을 부탁하다 매니저에게 거절당하지만, 오디션처럼 자신들을 어필하며 부르는 곡이다. 뜬금없이 영화의 분위기를 새롭게 돋우는 참 예쁜 곡이다.(대충 안 어울린다는 뜻) 숫자 송의 원조 맛집 되시겠다!

 

 

Contdown to Love - Street of Fire OST.